2010년 03월 01일
<시리어스 맨>과 <어웨이 위 고>
두 영화 모두 한 번 밖에 보지 않은 상태에서 몇 가지 정리되지 않은 이야기 하기.
<번 애프터 리딩>이 불편하고 자조섞인 농담이었다면 <시리어스 맨>은 진지한 묵시록에 가까워 보인다.(말이 거창하지만 그렇게 생각한다!) <번 애프터 리딩>은 "멍청한 미국인"들이 그들이 TV영화를 통해 학습받은 "스파이 영화"를 어설프게 모방하고, 그 모방이 실재 "스파이"의 말단과 불운하게 맞닿으면서 벌어지는 상황을 냉랭하고 마조히스트적인 놀림(이것은 동시에 새디스틱하다!*)으로 전시해 놓았다. 영화의 정조는 줄곧 편평하며 프란시스 맥도먼드의 촌스러움("멍청한 미국인")과 조지 클루니/틸다 스윈튼의 극단적인 세련됨이 무척이나 불편하게 공존하는 광경을 보여준다. (관객은 이 부조화에 십중팔구 짜증이 날 것이다. 덧붙이면 코언 형제는 그들이 줄곧 창조해내고는 하는 "가상세계"의 총체적인 세계관을 이 영화에서는 일부러 만들지 않은 것 같다. 그들은 <번 애프터 리딩>에서, 실재를 빌려와 사용하고 있다. 그리고 그것이 실재의 일부인 관객을 불편하게 한다.) 그리고 <번 애프터 리딩>은 어떤 것도 암시하지 않지만 어떤 것도 해결되지 않은 채 (프란시스의 작은 소망을 제외하면!) 갑자기 끝나 버린다.
또 다시 <레이디 킬러>스러운 촌극이다. 더 나쁜 감정을 자아내는 찜찜함과 함께. 적어도 <레이디 킬러>는 지금 있을 법하지 않은 애매한 시대의 애매한 공간에서 일어나는 불쾌한 일들을 다루었지만 <번 애프터 리딩>은 너무나도 미국적이고 있을 법한 공간과 시간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다룬다. 아무것도 바뀌는 것은 없고, 인물들은 견고한 시스템 안에서 멍청한 짓을 했을 뿐이다.
결론부터 말하면 <시리어스 맨>은 똑같은 이야기를 고상한 방식으로 한다. 삶의 끓임없는 불안함과 부침과 비가역성 등 포스트모던 이론가들이 복창하는 못난 진실을 조롱하듯 늘어놓는 것이다. 구체적인 이야기 하기.
<시리어스 맨>은 우화와 같은 첫 시퀀스로 시작한다. 19세기 초의 동구권 같다. 영어를 사용하지 않는, 일반 백인 영미권 관객들이 생소함을 느낄 만 한 언어를 사용하고 "미국화" 되기 이전의 시간과 공간에서 (나의 경우는 <까라마조프의 형제들>의 일상을 연상했다.) 남편은 눈길을 뚫고 집에 도착하여 마차를 댄다. 올가 , 정도의 이름을 가졌을 법한 촌부 아내가 남편을 맞는데, 남편은 자신이 반가운 사람을 만나서 망가진 마차를 고칠 수 있었고 그를 감사의 뜻으로 집에 초대했노라고 말한다. 그 사람은 마을 공동체 수준에서 그들이 익히 들어왔던 인물인데, 남편이 그의 이름을 말하자 아내는 표정이 굳는다. 그 사람은 3년 전에 죽었노라고! 남편을 그럴 리가 없다며 문제의 인물을 집 안에 들인다. 아내는 그가 악령이라고 주장한다. 그리고 염을 할 때 그의 시체가 없어졌고 그 흔적이 그의 몸에 남아 있음을 증명하며 그가 악령임을 확신한다. 남편은 무력하게 아내의 주장에 반박하지만 소용은 없다. 아내가 악령을 쫓기 위해 들어온 손님의 가슴을 흉기로 깊숙이 찌른다. 손님은 친절을 이렇게 갚다니, 어쩔 수 없군요, 라는 말을 남기고 다시 (흉기를 가슴에 박아넣은 채로!) 눈 속으로 사라진다. 그리고 이 장면은 끝이다. 아무 의미도 없다.
그리고 영화의 주 무대인 미국의 60년대 유대인 가정이 등장한다. 주인공인 물리학 교수는 보통 사람이다. 그는 아무 것도 하지 않았다. 그러나 줄곧 그에게 악재가 쏟아져내린다. 한국인 유학생이 촌지를 바치고 낙제를 면하게 해줄 것을 거부했다가 인신공격에 시달리고, 아내는 이혼을 요구하며(나중에는 집까지 나가라고 한다), 모자란 동생은 게이인 데다가 도박으로 주 경찰의 추적을 받는다. 그리고 아들의 유대식 성인식이 목전인데 이런 일들 때문에 돈은 턱없이 부족하다. 이 모든 일들이 동시다발적으로 일어나고 그는 여러 랍비들을 찾아가 삶의 조언을 구하고자 한다. 난 아무 것도 한 게 없는데 왜 이런 나쁜 일들이 나에게만 일어나는 걸까요!
이 정도가 줄거리 요약이라 할 수 있는데, 중요한 것은 줄거리가 아니다. 주인공을 중심으로 한 사건들의 "촉발"을 보면 심할 정도로 제멋대로이다. 통제 불가능한 것이다. 여기서 큰 대조 한 가지 - 유구한 유대 전통과 미국 유대인 커뮤니티의 연속성 안에 속한 안정적인 (가족) 단위와 주인공의 삶에서 드러나는 두드러지는 비연속성. 이 비연속성은 좁게 보면 미국 또는 후기 자본주의이고 약간 비약한다면 탈근대의 생활환경이다. 조금 더 부연하면 비논리적이고 우연하며 설명 불가능한 것.(<그 남자는 거기 없었다>에서의 변호사가 언급하는 불확정성의 원리를 상기하자. 공교롭게도 <시리어스 맨>의 주인공도 물리학 교수이며 슈뢰딩거의 고양이를 강의 중 언급한다.) 그 정점은 아내의 정부情夫의 갑작스러운 죽음과, 그 죽음이 주인공이 자동차 사고를 당한 시간과 같은 순간에 이루어졌다는 석연찮은 우연에서 이루어진다. 해결과 설명을 찾아서 주인공이 만나는 랍비들 모두들 시큰둥하거나 무의미한 이야기만 반복한다. 그리고 그 랍비들의 최종 보스 격인 인물은 주인공과의 대면에서 (그런 고난들이 있는데)"그래서 어쩌라고?(So, What then?)" 라고 직접 말해 버린다. 그 뒤에 생략된 말은 아마, 그래서 어쩌라고? 원래 사는 게 이렇게 좆같은 거임. 정도가 아니었을까.
그리고 또 하나 재미있는 것은 영화의 결말인데, 여기에서는 두 가지 장면이 교차하고 있다. 벌어졌던 문제들이 다소 사그라들고, 주인공이 다소 평화롭게 사무실에 앉아 있는 순간 그가 정기검진을 받았던 병원에서 전화가 온다. 무언가 발견했다고 한다. 전화로는 안 되고, 직접 만나서 이야기해야 할 문제라고 한다. (불안1 추가) 그리고 같은 시점에 토네이도 경보가 울리는데, 주인공의 아들은 학교 수업 중 대피 경보를 받고 학우들과 함께 대피소로 가기 위해 야외로 나온다. 그리고 멀리서는 토네이도가 보이고, 주인공의 아들이 그를 괴롭히던 녀석에게 드디어(아들은 영화 내내 돈을 못 갚아서 녀석을 피해 다녔다) 돈을 갚기 위해 다가가다 멈칫한다. 전형적인 헐리웃 영화의 문법으로 치면 이 다음 장면에서 어떤 일이 분명히 일어날 것이다. 토네이도는 가까이 다가오고 있고,카메라는 인물이 토네이도를 바라보는 뒷모습을 불안하게 비춘다.(불안2 추가) 관객은 무언가를 기대한다. 그러나 영화는 끝나 버린다.
아, 그래서 어쩌라고? 영화가 행복하거나 안심되는 결말을 맺지 않는 것은 편하게 이야기할 수 있다. 이것은 전형적인 포스트모던 텍스트의 표본이 아닌가. 리오타르가 말한 것처럼, 거대 서사의 해체의 일환이 아닌가 하는 것이다. 그렇게 말한다면 영화는 더 이상 뻔해질 수 없다. 자연히, 왜 <시리어스 맨>이 지겨운 해체를 수행하는데도 여전히 주목하거나 즐길 만한 텍스트인지 묻지 않을 수 없다.
내 생각은 : 여전히 <어웨이 위 고>와 같은 퇴행적인 텍스트가 가면을 쓰고 생산되고 있기 때문이다.
샘 맨데스의 다른 영화들을 (내가 본 것만) 나열해 보자. <아메리칸 뷰티>,<로드 투 퍼디션>,<레볼루셔너리 로드>. 공통적인 인상은 "미국"을 대하는 태도가 일관되게 폭로와 냉소로 채워져 있었다는 점이다. 그는 미국에서 영화를 만드는 영국인이다. 아마 그의 삶과 미국이라는 대상은 적절히 겹쳐져 있을 것이다. 외국인으로서 미국에 대한 적절한 거리를 유지하면서도 그 산업 내부에서 영화를 만드는 상황. 사실 <레볼루셔너리 로드>까지만 해도 퇴행적이라는 느낌은 희미했다. 무엇보다 영화는 만듦새가 좋았고 중산층 판타지/자본주의적 봉합의 허구성을 잘 드러내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의 영화들의 결말은 어딘가 공허한 구석이 있었다. 얼핏 생각하건대 코언 형제의 영화들에서 나타나는 결말과 <아메리칸 뷰티>(계속)
-<아메리칸 뷰티> 다시 보고 평론 차자보기.. 까묵엇당
# by | 2010/03/01 21:37 | writings | 트랙백






